이성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독 우리 사회는 이성에 힘을 실어주는 경향이 있음을 종종 목도하곤 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예술과 예술가에게도 적용되는데, 특히 아트앤테크(Art & Tech) 기반의 예술이나 뉴 테크놀로지 기반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섬세하고 개인적인 감정의 발화보다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의 향연을 기대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술이 예술가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표출을 허용하는 사회의 마지막 보루임을 망각할 때, 예술은 중요한 하나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나아가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와 예술 주제와의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간과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와 주관적인 감정에 대해 낯설게 바라본다면 현대예술에서 작가들이 환경, 젠더, 인종 등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를 작품 주제로 들여오면서 이해와 비평이 일반적(정치적 올바름 등)인 방향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오현주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술가 개인의 서사와 감정 표출이 어떻게 ‘오디오 드라마 설치(Audio Drama Installation)’와 어우러지는지,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작가와 작업의 특징과 의의를 함께 짚어보며 이것이 어떻게 예술가의 자유 발언과 표현을 가능케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현주 작가의 최근작 <Blue Burn>(2022)은 특정한 공간(대학병원 마취통증치료실)에서 펼쳐지는 오디오 드라마 사운드와 퍼포머의 퍼포먼스가 함께 진행되는 인터미디어 설치 작업이다. 14 채널 사운드, 10개의 조명 채널, 2개의 영상, 오디오 드라마와 공연 채널로 구성되었으며, 오브제, 사운드, 조명, 퍼포머(작가)가 등장한다. 병동 베드,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려진 과장된 링거줄과 같은 전선, 밧줄 등의 오브제는 연극적인 무대 장치들로 소환되고, 나뭇가지와 조명 등은 관객을 특정한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오현주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1차원적인 시각물들은 단순히 상황을 ‘재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이야기로 안내하는 장치가 된다. 설치물들은 상황을 묘사하는 것들과 퍼포머이자 작가 자신인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조명과 베드 위에 설치된 밧줄 등은 주인공이 차가운 베드에 누워 자유롭고 낭만적인 밤하늘로 탈출하는 상상의 길로 안내한다. 이런 오브제들은 작가의 작품이 표현된 무대 위에 재현과 묘사 외에 작가의 내면과 상상을 늘어놓을 수 있는 장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장치들로 하여금 우리는 작가가 꺼내놓고 싶어 하는 내밀하고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로 초대받기 때문이다.
오디오 설치는 직접적인 알레고리 오브제보다는 좀 더 간접적으로 관객에게 노출되지만, 심리를 계산적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사운드는 다시 두 가지 역할로 나뉘어 구분할 수 있는데, 작품이 펼쳐지는 특정 공간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과 작가의 직접적인 ‘내면의 독해’를 여는 역할이다. 작가는 실제로 겪었던 특정한 경험이 형성한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과 함께 꿈을 조합하여 물질과 비물질의 요소를 결합한 연극을 올린다. 여기서 사운드는 조명과 더불어 다분히 의도적으로 정서를 전달한다. 여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좀 더 분석이 용이해지는데, 연극은 퍼포머(작가)가 우퍼를 껴안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장면이 전환될 때, 공간을 환기시킬 때 등장하는 사운드(종합병원 병동의 소리, 카트가 굴러가는 소리, 침상 밖의 바람소리 등)는 1차원적인 물리적인 작품 공간의 세계를 형상화한다. 한편 작가에 의해 계산되고 의도된 효과음은 관객의 정서적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퍼포머와 서브 우퍼 뒤편 위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유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섬세하게 들린다.
날카롭게 그리고 부서질 듯 섬세한 느낌으로. 한편으론 청아하게 들리기도.
마치 마음 속에 가시들이 돋아나듯 깨지고 부딪히며 밖으로 나온다.
그리곤 유리 소리와 함께 가는 휘파람 소리가 퍼포머를 향해 들려온다.
동시에 노란 불빛도 퍼포머를 향해 쏟아진다.
- 오현주, <Blue Burn>(2022) 시나리오 중
‘날카롭게 그리고 부서질 듯 섬세한’, ‘한편으로 청아하게’, ‘마음 속에 가시들이 돋아나듯’ 등의 표현으로 알 수 있듯, 사운드들은 직접적으로 작가와 관객들의 심정과 연관되어 있으며, 사운드는 다시 조명과 퍼포머의 동선(우퍼를 안고 힘없이 앉아 있는 퍼포머)과 결합되어 점층적이고 다층적인 장치들로 확산된다.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극에 등장하는 대사들(“내가 아파서 왔는데, 왜 더 아파야 해요!”)은 드라마적인 분위기를 한 층 더 고조시킨다.
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 ‘몰입형 오디오 드라마 설치’는 궁극적으로 작가의 자전적이고 고백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이자 장치들의 복합 요소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또한 자신의 작품을 일컬어 “존재와 시간, 그리고 감정의 공진화된 형태”를 다룬다고 말한다. 이것은 총체적인 작품 자체가 결국은 작가의 특정한 기억의 공간에서 공진하고 있는 심리적인 형태를 가시적으로 옮긴 결과물이며, 작가는 이 경험에 대한 현대미술적인 표현과 더불어 타인의 공감, 그리고 연대를 시도하려는 용기를 내어 이 작품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은 다양한 얼굴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작가의 어떤 이야기를 담고 그것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형식과 내용이 결정된다. 그것이 작가의 자전적인 독백을 담고 있을 때, 예술가와 관객 모두 표면적인 창작과 감상의 막을 뚫고 비로소 예술을 통한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Breath>(2019)는 오현주 작가의 현재의 작품세계를 완성하게 된 중요한 단초가 되었던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오디오 드라마를 기반으로 한 멀티미디어 설치 작업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인 틀은 이 작업을 통해 갖추어 졌다. 이 작업은 주인공이 공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스토리로 진행된다.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공간에서 흥미롭게도 관객이 주인공의 ‘탈출 불가’ 상황을 인지하는 장치는 역시 사운드이다. 관객은 전시 공간 안에서 주인공의 모든 움직임을 듣게 된다. 이런 ‘소리 내러티브적’인 상황에서 형성된 가상공간은 주인공(작가)의 심리적/정서적인 공간에 대한 은유이자 총체이며, 작업의 무대는 작가의 지극히 내면적이고 고백적인 심리 공간이다.
감정과 정서, 공명과 공감의 영역은 사회의 이성적인 논리 수면 아래 잠겨 있다. 예술 분야 역시 작가 개인의 감정이 지나치게 뜨겁거나 비약적일 때 제도권은 이를 다소 외면해왔다고 생각한다.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관심을 받는 영역은 언제나 차갑고 정제된 예술품들이었고, 그 안에 작가의 진짜 감정과 이야기는 숨겨져 있었다. 오현주 작가의 작품은 오브제와 사운드가 결합하여 발생하는 사운드 스케이프와 서사를 통해 작가의 내면적 독백을 전달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회를 거듭하며 개념을 발전시키고 세계를 확장해 나아간다. 시나리오에 의해 기획되고 계산된 사운드는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오브제와 결합하여 무대 위 생명력을 입힌다. 사물과 인간은 작가가 연출한 하나의 무대 위에서 의인화되며, 움직임에서 비롯된 파동은 관객에게 공간 인지와 함께 작가의 내밀한 감정을 전달한다. 고통, 통증, 어두움, 기억, 상상의 내면적 공간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벽 너머의 소통의 세계의 가능성을 꿈꾸면서 말이다.
조숙현 (전시기획자 / 미술비평가)
조숙현은 연세대학교 영상 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졸업했다. 영화주간지 FILM 2.0과 미술월간지 PUBLIC ART에서 취재 기자로 문화 예술계에 입문한 뒤, 미술비평가와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보기>(2015), <서울 인디 예술 공간>(2016) 등이 있다. 기획한 전시는 <강원국제비엔날레 2018 : 악의 사전>, <X-사랑>(2019), <이야기를 지나 출구>(2020), <변덕스러운 부피와 두께>(2021) 등이 있다. 2018년부터 현대미술 전문 출판사 아트북프레스(Art Book Press)를 설립하고 현대미술 전문 서적과 아트북을 출간하고 있다.